2018-04-27(금)~29(일)
2박3일
중국 대련,여순여행
대련 (大連 다롄 Dalian )
여순 (旅順 뤼순 Lu-shun)
대련...지명조차 처음 들어본 도시입니다.
짧게 2박3일 위주로 여행사 뒤적이다보니
알게 되었어요.
비행시간도 짧게
여행비용도 싸게
제주도하고 비슷하게
힘들지않게 가볍게
갔다 오기 좋았습니다.
대련시내는 깨끗했고
깨끗하려고 노력중인것이 보였고
곳곳에 유럽을 따라한 건물들이 많았어요.
(예: 동방수성, 어인부두 등등)
중국이 안 보여
오히려 서운했지요.
차로 1시간 거리인
대련시 여순구에는
중국과 우리나라의
아픈 역사가 공존하는
여순감옥, 여순법원이 있어
역사공부를 할 수 있었어요.
중국의 막 입대한 군인들과
몇백명되는 초등학생들의 견학과
겹쳐 같이 관람했어요.
중국 어린학생들한테
안중근이라는 이름을
들으니 뭉클했구요.
안중근, 신채호,이회영
이분들의 업적에 눈물 핑 돌았고,
법원에서 안중근의사의 영상보며
안중근의사의 독방을 보며
눈물 흘렸습니다.
의미있는 여행이었어요.
뤼순항 전투
1904~05년 만주와 우리나라의 배타적인 지배권을 둘러싸고 러·일 전쟁이 발발한다. 일본과 러시아는 조선과 청나라의 지배력을 확장하기 위해서 계속 갈등 중에 있었다. 1900년 의화단 사건을 계기로 제국주의 열강과 공동 출병한 러시아군은 만주를 점령, 조선을 일본과의 완충 지대로 삼으려 했다. 일본은 영·일 동맹을 체결하여 대응하면서 만주에서 러시아의 철병을 요구했으나 1903년 4월로 예정된 제2차 철병을 거부하는 대신에 오히려 만주에 군대를 증파했다. 일본은 1904년 2월 4일 대(對)러 교섭 단절과 아울러 개전을 결정했다. 2월 8일 뤼순항을 기습 공격하여 전함 2척과 순양함 1척을 파괴하고, 9일 인천항에 정박 중인 러시아 함대를 격침시킨 다음 10일 선전 포고를 하면서 러·일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게 되면서 우리나라는 제국주의 열강의 승인 내지 묵인 하에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게 되었다.<퍼옴>
여순감옥
다롄 시내에서 45km 떨어진 뤼순(旅顺) 지역은 랴오둥 반도의 최남단에 위치해 있다. 중국의 주요군항으로 해군 기지와 잠수함이 떠 있어 불과 몇년 전까지 외국인은 출입할 수 없었지만, 지금은 다롄을 찾은 한국인들이 잊지 않고 방문한다. 일제 강점기 때 항일 지사들이 갇혀 있던 뤼순 감옥을 방문하기 위해서다.
감옥은 총 275개의 감방에 2,000여 명을 동시에 수용할 수 있는 규모로 지어졌다. 일본은 한국과 중국의 항일 지사를 사상범이라는 명목으로 닥치는 대로 잡아 이곳에 수감했다. 1906~1936년 사이에는 수감자가 연간 2만여 명에 달했다고 하며, 그중 700여 명이 이곳에서 처형되었다. 특히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 역에서 한국 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안중근 의사가 수감되었던 독방이 고스란히 보존돼 있어 눈길을 끈다. 명문가의 자손이면서 독립운동에 헌신한 이회영 선생, 역사가이자 언론인이었던 신채호 선생이 수감돼 있던 흔적도 남아 있다.
일본의 만행이 가장 끔찍하게 드러나는 곳은 사형장이다. 한 번에 한 사람씩 사형을 집행하는게 아니라, 세 사람을 나란히 세워 목에 줄을 동여맸다. 사형을 집행한 후에는 목숨이 붙어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가느다란 쇠꼬챙이를 목구멍에 꽂아 보았다. 시신은 사형장 아래 나무통으로 떨어뜨려 반으로 접어 넣었다. 마지막 죽는 순간까지 인권은 철저히 무시되었던 것이다. 당시 사용했던 도구와 사진으로 과정을 적나라하게 설명한다. <퍼옴>
여순관동법원
여순관동지방법원은 최초 건물은 러시아에 의해 세워졌다. 러시아는 1902년 군사들의 휴식을 위해 이곳에 병영(兵營)을 설치하였다(현재 건물의 양쪽 끝에 있는 단층방). 일제는 러일전쟁에서 승리하여 여순을 점령한 후 1906년 9월 이곳에 관동도독부 고등법원과 지방법원을 설치하였다. 그해 11월 양쪽 끝 단층방 사이에 2층 건물을 올리는 공사를 시작하였으며, 1907년 10월 완공되었다.
여순관동지방법원은 일본의 대표적인 식민통치 기관으로 중국인뿐만 아니라 당시 요동지역에 거주하던 러시아, 이집트, 터키, 독일의 반파시즘 인사들이 판결을 받고 투옥된 곳이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안중근이다. 안중근은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이후 여순일아감옥에 수형된 후 1910년 2월 7일~14일에 이곳 대법정에서 6차례에 걸친 재판을 받았다. 안중근의사는 이 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 초고속으로 진행된 재판에서 안중근은 분명한 어조로 동양의 평화사상과 일본 제국주의의 죄상을 세계에 폭로하였다. 영국의 『더 그래픽』이란 잡지는 "세기적인 재판의 승리자는 안중근이었다. 그는 월계관을 거머쥔 채 자랑스럽게 법정을 떠났다. 그의 입을 통해 이토 히로부미는 한낱 파렴치한 독재자로 전락했다." 라고 보도하였다. <퍼옴>
2013년 독립기념관의 협조로 한국인 관람객들을 위해 한글과 중국어가 병기된 전시 패널 설명문을 설치하였다.
만충묘
여순대학살의 피해자들을 기린 만충묘
여순 대학살은 청일 전쟁 중 1894년 11월 21일부터 2~3일간 뤼순을 공략할 때 시내와 근교에서 야마지 모토하루가 이끄는 일본 제2군 1사단에 의해 청나라군 패잔병을 소탕하는 과정에서 여순 시민을 학살한 사건을 말한다. 일본군은 1,000에서 2만명에 이르는 군인과 민간인을 살해하고, 단 36명만 남기고 시신을 매장하였다. 더 높은 수치의 추측도 가능하지만, 오늘 날의 문헌 조사에서 당시 여순항의 전체 인구는 6,000명으로, 요새의 군인들은 13,000명에 달했다. 이후, 수치는 그 분쟁에 청나라와 교전한 양측에서 수집된 교전 대상 18,000명에서 중국인 사망자는 1,500명에 이른다고 추측되고 있다. 이 사건은 중국에서는 ‘여순대도살’(旅順大屠殺)이라고 하고, 일본에서는 ‘여순학살사건’(旅順虐殺事件)이라고 한다.
<퍼옴>
여순박물관
제정 러시아 “장교집회소”로 쓰고자 짓다가, 1917년 일본이 대련을 강점한후 그대로 이어 완공하고“관동도독부 만주、몽고 물산관”으로 사용하였다. 1918년에 명칭을 관동도독부 박물관으로, 이듬해엔 관동청박물관으로, 1934년에 여순박물관으로 개명하였다. 그 후 1945년 소련이 인수、관할되면서 또 여순동방문화박물관으로 명칭이 고쳐져서 불려졌는데, 1952년 12월 다시 여순역사문화박물관으로 1954년에야 정식으로 여순박물관으로 명명하고, 중국 역사문물들을 전시하였다. 진렬관의 면적은 1,864㎡이며, 역대의 진귀한 청동기와 도자기, 칠기, 경태란, 서화와 조각예술품들이며 현지에서 발견된 고대 생산공구와 생활용품, 전시품 등 소장품들이 어마어마하게 진렬되여 있다. 전시품 중 특이한건 당나라 신강 투루판 지역에서 발견된 미라 7구 및 진귀한 문물들이 진렬되어 있다. 고고학전문가들의 검증에 의하면 이 7구의 미라는 모두 1300~1400여년전 무덤에서 발견한것이라고 한다. <퍼옴>
백옥산 풍경구
여순구 중심에 위치해 있으며 국가AAAA급 관과풍경구,성급문물보호단위이다
백옥산의 원명은 서관산으로서 청나라의 이홍장이 여순을 시찰할때 백옥산으로 개명하였다.
해발130미터이고 정상에 오르면 여순구의 전경,장엄한 군함및 해군함대를 한눈에 바라볼수 있다.<퍼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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